♧ 권태
여름에 태어나서일까. 여름이면 치열해진다. 그러다 지치면 여름을 앓는다.
책도 두꺼운 걸 찾아 읽기 시작한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로 시작하는 『달의 궁전』을
『아미엘의 일기』를 읽은 것도, 『발자크 평전』에 마음 빼앗긴 것도,
『안나 카레니나』1,2,3 을 읽은 것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난 것도 여름이었다.
눈부신 하늘만큼이나 또렷해지는 정신 때문인지 때론 일탈을 꿈꾼다.
태풍이 휩쓸어버린 바닷가에는~ 으로 시작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스무 살의 여름이었다.
여름, 나는 권태와 함께 있다.
고단한 길처럼 길게 늘어선 실선을 따라 가다 보면 어디선가 나를 만날 수 있을까?
권태로울 때 나는 서점을 간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천천히 긴 호흡으로 책을 읽는다.
‘우리 사이엔 칼이 있었네.’/보르헤스가 묘비명으로 부탁한 글.
이런 글을 만나면 노트를 편다.
나와 노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울 속의 나와 함께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일은 노트를 펴는 것이다.
화장실 가고 밥 먹는 시간을 빼고 나는 늘 노트에 몰두해 있다.
일기장이기도 하고 독서록이기도 하고 낙서장이기도 한 노트를 펴는 일은 나의 일상처럼 친숙하다.
지난주 책장에 있던 노트를 모두 꺼내 벽에 세워놓았다.
대략 100권쯤 되는 노트를 세로로 세워놓으니 시간의 세례를 받은 노트에선
뚝뚝 내가 지불한 지적 허영의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지난 시간들이 한 줄로 서 있는 듯했다.
생이 권태로워지면 한 권씩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