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을 필사하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이성복-아주 흐린 날의 기억」
거리에는 사랑을 묻다 지친 사람들의 무리 혹은 사랑과는 무관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어쩌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 거리에서 오시록한 사랑 한 조각을 만날 수 있을까?
그녀를 만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가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찰랑이는 풍족한 일상에도 가라앉곤 하는 치명적 자유에 흔들리는 여자 수잔 로링즈.
그녀에게는 잘 커가는 아이들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생활과 완벽한 남편이 있다.
수잔은 감정의 사치를 벗어나 고독하면서 그러나 달콤한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일주일에 서너 번 낡고 초라한 프레드 호텔에 드는 것이다.
그녀가 호텔에서 하는 일은 글을 쓰거나 와인을 마시는 것도 그렇다고 남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등걸이가 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일.
창을 통해 보이는 자기 자신을 보며 얼마간 마음을 놓아버리는 자신에게 골똘해지는 것.
혼자였다. 혼자였다. 완벽하게 혼자였다.
고요하되 뜨거운 그러면서 두렵기도 한 자유로운 몇 시간.
그저 조용한 것이 아닌 부러 조용한, 다만 혼자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립된
치명적인 자유에 자신을 맡긴 수잔의 일탈. 그러나 그녀의 완벽한 외출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남편의 미행이 이어지고 타인의 시선을 받은 그녀의 완벽한 고독은 허물어진다.
수잔은 스스로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 시간이 온통 그녀에게로 흐르는 구름 많은 어느 가을날
마지막으로 프레드의 호텔에 든다.
그녀는 4시간을 오롯이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다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지 않은 침대에 든다.
가스를 켜고 실비아 플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자유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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